울고 싶을 때 뺨 때려준 리쿠르터
작년 초 시카고에 있을까 타주로 갈까 고민 끝에 시카고에 남기로 했다. 시카고에는 동부나 서부와 달리 큰 IT 회사들의 오피스가 별로 없다. 있다고 해도 작은 편이다. 대신 시카고에는 증권, 보험, 은행 등 금융 관련 회사들의 오피스가 훨씬 더 많고 규모도 크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증권/선물/옵션 거래 쪽 경험을 쌓아서 이 길로 나가자였다. 그래서 선물 거래 시스템을 만드는 회사에 서버 개발자로 이직을 했고 일한 지 8개월 정도 됐다.
풀스택 개발자에서 서버 개발자로 변경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스레드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버그를 잡는 일이 주된 업무였다. 일은 할만 했지만 풀스택 개발에 비해 재미는 좀 떨어졌다.
창업자인 VP와 입사 전 전화로 작은 회사에 대한 걱정, 회사를 인수한 모기업에 대한 Glassdoor에 있는 안 좋은 리뷰들에 대한 걱정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는 Glassdoor에 올라온 거의 모든 리뷰에 댓글을 달며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VP는 날 안심시켜줬고, 나는 입사를 결정했다. 하지만 그는 모기업에 회사를 처분한 지 1년이 되는 날, 그러니까 내가 입사한 후 한 달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이 ㅅㄲ 가 진짜..
8개월 동안 다섯 명 정도의 직원이 그만뒀다. 8개월 만에 다시 Glassdoor를 보니 안 좋은 리뷰가 몇 개 더 추가되었다. 대부분 모회사가 인수하고 나서 점점 나빠졌다는 리뷰들. 2월이 거의 다 되어가는데 아직 작년 업무 평가 지침도 안 내려왔고, 물론 올해 계획 발표도 없다. 시카고 사무실은 임대료가 비싸서 공간을 반으로 줄이거나 다른 곳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한다.
일도 좀 재미없고, 회사도 뒤숭숭한 마당에 1월 3일 한 리쿠르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8개월 만에 이직이라니, 좀 이른 감이 있지만 그래도 가고 싶었던 회사여서 덥석 응답을 했다. 리쿠르터는 간단히 통화를 한 후 고객사에 물어보고 연락을 준다더니 감감 무소식이다.
또 다른 리쿠르터가 연락이 왔다. 이 리쿠르터는 링크드인 메일을 통해 연봉 액수와 직위를 공개하면서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일단 제시한 연봉이 마음에 들어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현재 3개의 고객이 개발자를 구한다며 채용 공고를 보여줬다. 리쿠르터의 고객은 시카고 선물 거래소 (CME), 600여명의 중견 IT 기업, 140명 규모의 투자회사였다.
CME 공고는 지금 하고 있는 일과 많이 연관이 되어있고 계속 이 업계에 있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서버 개발자 역할이고, 원하는 연봉을 받기 어려웠다.
투자 회사는 리쿠르터가 가장 추천하는 회사였다. 연봉도 높고, 복지도 좋고, 근속 연수도 길고, 다 좋다는 거다. 풀스택 개발자를 뽑기 때문에 하는 일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지금 있는 곳이 200여명 규모의 회사인데 더 작은 곳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중견 IT 기업은 기업용 문서 솔루션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셋 중 중간이었다.
처음에는 CME와 중견 IT 기업만 면접 보려고 했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다 지원해 보기로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더라
2월 7일 목요일에 이력서를 리쿠르터에게 전달했다. 다음 날인 2월 8일 리쿠르터에게 연락이 왔다.
Please give me some availability for an in-person interview for next week? This will last around 2 hours in length.
이게 뭔가 싶었다. 전화 인터뷰도 없이 바로 2시간 정도 대면 인터뷰라. 예전에 Chase와 All State에서 이렇게 면접을 한 적이 있었다. 전화로 하면 될 것을 사람을 다운타운까지 오라고 해서 1시간 동안 면접을 했다. 1시간 짜리 면접을 통과하면 4-5시간 짜리 인터뷰가 또 남아있다.
그래서 전화 인터뷰 대신 하는 만나서 하는 인터뷰인가 물어봤더니 온사이트 인터뷰란다. 1인당 인터뷰 하는 시간이 짧을 뿐 HR, 개발자, 매니저, CIO까지 다 만나는 인터뷰 종합 선물 세트였다.
리쿠르터는 이 채용 공고에 다른 사람을 추천 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전화 인터뷰를 먼저 하고 온사이트를 진행했다. 이것 저것 많이 굴러먹은 내 이력이 마음에 들어서 전화 인터뷰를 생략하고 바로 온사이트로 불러준다는 리쿠르터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내 이력이 아주 마음에 들었거나, 정말 급했거나. 아니면 둘 다.
다행히 투자 회사는 현재 일하는 곳 길 건너 건물에 위치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좀 일찍 퇴근하고 면접 하면 되는 스케줄이었다. 2월 12일 화요일에 인터뷰 하기로 했다.
인터뷰 준비
리쿠르터와 전화와 이메일만 주고 받았지 실제 만난 적이 없었다. 리쿠르터가 전화해서 회사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고, 내 위치를 알려주니 깜짝 놀라는 것이다. 내가 근무하는 곳 27층에 리쿠르터가 있었다. 리쿠르터는 아주 잘 되었다며 월요일에 인터뷰 준비를 위해 잠시 만날 약속을 잡았다.
리쿠르터는 투자 회사가 오랜 고객이고, CIO도 자기들이 입사 시켰고, 다른 몇 명의 직원도 입사를 시켰다고 한다. 물론 지금의 채용 공고에 추천한 다른 지원자는 실패했다며 실패 요인을 나에게 알려줬다. 인터뷰 후 받은 피드백을 근거로 나에게 인터뷰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조언을 해줬다.
지난 번 구직자는 너무 단답형으로 대답을 했다고 한다. 뭔가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가는 인터뷰를 기대했는데 대답의 깊이도 없고, 너무 단답형이서 대화가 자주 끊겼다고 한다. 소통이 중요한 평가 항목 중의 하나니까 답변은 물론 한 발 더 나아가 질문도 능동적으로 하라고 조언을 받았다.
채용 공고에 따르면 React와 Spring Boot 경력이 요구되었다. 스프링은 경력이 있지만 React는 호기심에 공부해본 것이 전부였다. 대신 Angular를 업무에서 사용한 적은 있었다. 이에 대해 리쿠르터의 조언은 솔직하게 Angular와 React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하고 금방 배울 수 있다고 대답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니저는 개발자로 시작했기 때문에 개발에 대한 것도 자세하게 물을 수 있다고 했다. 이력서를 중심으로 이전 프로젝트에 대해 대답을 준비하도록 조언을 받았다.
HR과 CIO 인터뷰에 대해서는 회사의 문화, 분위기 이런 것을 중심을 대화를 이끌어 나가라는 조언을 받았다.
인터뷰 당일
HR 매니저와 첫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사실 인터뷰라기 보다는 회사 연혁, 구조, 수익 모델 등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뭔가 회사 설명회 장에 온 느낌이었다. 그게 끝나고 오히려 내가 질문을 더 많이 했다. 미리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About Us에 있는 설명 중 이해 안 가거나 더 궁금한 것들 위주로 질문을 하며 30분을 마무리했다.
두번째는 Software Architect와의 인터뷰. 회사에서 11년을 근무했다고 한다. 알고리즘, 코딩, 아키텍쳐 같은 질문은 하나도 없었다. 대신 왜 지원했는가, 회사 A, B, C에서는 무슨 일을 했는가, 왜 이런 조합을 사용했는가 등등 경력 위주의 질문들이 이어졌다.
리쿠르터의 조언대로 질문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을 했고, 나도 비슷한 질문을 다시 리쿠르터에게 던지며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예를 들면 이전 회사에서 X, Y, Z 조합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당신네 팀은 어떤 조합인가, 왜 그 조합인가,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등등. 30분으로 예정된 인터뷰는 거의 한 시간을 이어졌다.
그 다음은 매니저와의 인터뷰가 1시간 동안 잡혀있었는데 30분만에 끝났다. 기술적인 것을 물어볼 수도 있다는 리쿠르터의 조언과는 달리, 전화 인터뷰에 나올만한 질문들을 받았다. 왜 옮기려고 하나, 이전에 무슨 일 들을 했었나, 궁금한 점은 없나, 박사 학위 논문 주제 등에 대해 물어봤다.
마지막 CIO와의 인터뷰. 이력서를 훓어보더니
박사 학위가 있네? 나는 학사 밖에 없어서. 기술적인 건 물어보면 안되겠다 ㅎㅎ
CIO 역시 매니저처럼 왜 옮기려고 하니, 이전 회사에서는 뭐했니 같은 질문들을 받았다. 답변을 마치고 궁금한 것들 물어보라길래 구인 공고에 대해 물어봤다.
나: 이 공고가 왜 올라왔나? 누가 그만 둔건가?
CIO: 응. 개발자가 시애틀로 갔어. 시카고가 너무 추웠나봐. 파하하하
나: 얼마 동안 공고를 했나?
CIO: 2개월 정도?
나: 왜 2개월이나 되었는데 자리를 못 구했나? (사실 나도 링크드인에 2개월 된 공고가 있으면 지원 안 할듯)
CIO: 요새 개발자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 실력이 안 되는 애들도 있고. 한 명은 인터뷰 하고 다음날 "다른 회사에서 오퍼 받아서.." 하며 채용 절차 멈춰 달라기도 하고.
5-10년 경력 개발자는 정말 많은 회사에서 원할테니 이직하기 쉽긴하다. 그래서 나역시 이런 절호의 찬스를 작은 회사에 써야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CIO가 원하는 인재상이 무엇인지, 이 회사의 장단점음 무엇인지 등등 추가 질문을 하고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다.
인터뷰가 끝나니 예상 시간보다 30분이 더 지나있었다. 이미 원래 타려던 기차는 늦었지만 다행히 다음 기차가 10분 후에 있었다. 역으로 뛰어가는데 리쿠르터가 전화가 왔다.
리쿠르터: 인터뷰 잘 했어?
나: 응, 나 지금 끝나서 역으로 달려가는 중
리쿠르터: 지금? 역대 지원자 중에 제일 오래 했어 니가. 그 회사에서 너 맘에 들어하나보다.
나: 알려준 대로 대답 길게하고, 질문도 많이 했어.
리쿠르터: 일았어. 알아보고 내일 연락 줄게
오퍼와 협상
인터뷰 다음 날 리쿠르터로 부터 전화가 왔다 투자 회사에서 아주 마음에 들어한다며 오퍼가 오늘 중으로 나올 것 같다고 알려줬다.
리쿠르터: 거기서 $X를 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내가 $2K를 더 요구할거야
나 대신 연봉 더 달라고 싸워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편했다. 정말 그날 점심 전에 그는 $X + $2.5K의 연봉이 적힌 오퍼를 내게 전해줬다. 사이닝 보너스는 없었다.
나: 사이닝 보너스는?
리쿠르터: 그건 필수 항목이 아니라. 얘기 해 볼게. 한 $2,500 정도 받을 수 있을지 몰라
리쿠르터는 다음 날 오후 사이닝 보너스 $7,500이 적힌 새로운 오퍼를 나에게 전해줬다.
워낙 번개불에 콩 튀겨 먹듯 빨리 지나다가 보니 실수(?)를 한 것이 하나 있다. 리쿠르터도 내게 희망 연봉을 물어보지 않았고 나도 리쿠르터에게 투자 회사의 연봉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게다가 $X + $2K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내 의견을 피력했어야 했는데 깜빡하고 지나갔다.
원하는 연봉은 $X + $5K였다. 첫 오퍼가 오면 카운터 오퍼를 통해서 원하는 금액에 근접한 최종 오퍼를 받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사실 $X + $2.5K를 받아도 현재 연봉보다 8.6%가 인상된 금액이라 나쁘지는 않았다.
리쿠르터는 내가 빨리 오퍼를 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계속 이 회사가 복지가 좋고, 직원들 근속연수가 높고, 보너스도 매년 나왔고 액수도 target 보다 더 나온다며 계속 나를 설득했다.
사실 리쿠르터의 말은 다 맞았다. 링크드인을 통해 본 결과 30년 된 회사의 직원들 근속 연수는 거의 10년에 육박했다. 휴가는 4주부터 시작해서 연차가 높아지면 더 늘어난다. 오퍼에는 5주의 휴가가 적혀있었다. 401k는 6%까지 매칭을 해주고, 추가로 6%를 더 해준다. 보너스 타겟은 10%였다. 보너스 수치가 좀 낮은 것은 아쉽다.
그래도 카운터 오퍼 없이 오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리쿠르터에게 $X + $5K, 보너스 타겟 15%, 사이닝 보너스 $25,000을 요구했다. 지금 회사에서 봄이면 보너스를 받을 지 모르는데 포기하고 나가야 하니 매꿔달라는 핑계로 사이닝 보너스를 좀 높게 불렀다.
사실 이 요구 사항은 오퍼가 나오기 전에 리쿠르터에게 전달이 되었어야 했다. 그래야 리쿠르터도 중간에서 여러 번 왔다갔다 하지 않고 한 번에 협상을 할 수 있으니 더 수월할테니.
리쿠르터: 사이닝 보너스 $25,000은 너무 많아.
나: 많은 건 좀 인정. 나도 여기서 보너스 포기하고 나가야 하는거라. 그래도 $7,500은 너무 작아. $10,000 만들어줘.
리쿠르터: 일단 노력은 해볼게. 투자 회사에서 오퍼 철회하지 않길 바랄뿐이야.
사실 리쿠르터가 $X + $2.5K를 받기 위해 $X + $5K 이상을 요구했을거다. 그래야 $2.5K를 절충안으로 만들 수 있을테니. 그런데 내가 리쿠르터를 통해 또 한 번 요구를 하고, 거기에 각종 수치를 다 올려달라고 해서 그런지 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오퍼는 취소되지 않았다.
리쿠르터: HR에서는 기존 직원과 비교했을 때 그게 적정선이래. 대신 내가 커미션 받으면 $2,500 줄게. 대신 기존에 우리가 입사 시킨 직원이 있는데 그 친구한테는 비밀이야.
지금 살고있는 집을 살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판매자가 $500인가 $1,000 상당의 집 보험을 사주기로 했다. 식기 세척기, 에어콘 등이 고장나면 그 보험을 이용해서 고칠 수 있었다. 사실 그 보험 없이도 고치는 건 비슷한 가격으로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계약서에 판매자가 보험을 사주기로 한 조항이 부동산 중개인의 실수로 사라져버렸다. 이미 양쪽 서명이 끝난 상태였다. 부동산 중개인은 본인이 받을 커미션을 줄이고 그 돈으로 집 보험을 우리에게 사줬다. 사소한 보험 하나로 계약을 날리는 것이 중개인에게는 더 큰 손해였으리라.
리쿠르터도 자신의 수익이 조금 줄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낫고, 고객이 원하는 인재를 빠른 시일 안에 공급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게 나았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퍼를 수락했고 3월 중순부터 새로운 직장으로 옮길 예정이다. 새 직장에서는 근속 30년 채우고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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