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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저 똥퍼요

by 목장주 2017.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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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꽃이 있는 화분을 사다 키우기, 씨앗이나 묘목을 심고 키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사오는 식물들이 족족 말라죽기 일쑤였습니다. 아내가 홈디포에서 예쁜 꽃이나 과실수 묘목을 보고 있으면, 제가 묘목들에게 "죽은척 해 얘들아 그래야 살아", "눈을 마주치지마 마주치면 죽어" 뭐 이렇게 놀리곤 했습니다. 아내는 화분으로 성이 안 차는지 텃밭에서 대량 살상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네이퍼빌은 공터를 텃밭으로 만들어 놓고, 매년 선착순으로 빌려줍니다. 큰 밭은 가로 세로 각각 29피트, 18 피트이고, 작은 밭은 14.5피트, 18피트 입니다. 지역 주민일 경우 1년에 내는 비용은 큰 밭은 $43, 작은 밭은 $23입니다. 


밭 옆에는 말똥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있습니다. 예전에 같이 일하던 직원은 교외에 살면서 말을 몇 마리 키우는데 말똥 치우는 것이 꽤나 귀찮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 직원처럼 말을 키우는 가정들을 돌며 얻었는지, 큰 목장에서 얻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퇴비로 쓰라고 쌓아놓은 말똥은 텃밭 이용자들에게 공짜입니다.


맨날 식물을 말라죽이던 아내가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고 인터넷도 찾아보며 공부를 하며 내린 결론은 물도 잘 줘야하지만 거름을 잘 줘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아내에게 때마침 텃밭 옆에 쌓여있는 말똥은 가뭄의 단비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말똥은 정말 식물들이 쑥쑥 자라게 해줘서 아내의 대량 살상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말똥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긴 하지만 넓은 텃밭에 많은 주민들이 같이 쓰는 것이기 때문에 늦게가면 그마저도 없습니다. 매년 봄 텃밭이 공식적으로 시작하는 날이 있지만 그 동안 쌀쌀한 날씨 때문에 텃밭을 갈 생각을 안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모처럼 주말에 시간도 나고 날씨도 따뜻해서 똥 푸러 가기로 했습니다.


텃밭과 말똥이 쌓여있는 곳과의 거리는 걸어서 1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리어카도 없고, 양동이에 담아서 들고 운반하기에는 무겁고 여러 번 왔다갔다 해야합니다. 많은 양을 쉽게 퍼다 나르기 위해서는 플라스틱 양동이에 잔뜩 담은 후 차에 싣고 한 번에 운반하는 것이 좋습니다. 집에 있는 플라스틱 양동이 1개와 홈디포에서 추가로 4개를 더 사 총 5개를 가지고 갑니다. 


장화로 갈아신고 한 삽 푹 푸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이 보입니다. 날도 따뜻한데다가 겨같은 것도 섞어 놓으니 아주 잘 삭고 있나봅니다. 혼자 똥 푸기 뭐 했는데 옆에 아주머니 한 분이 오셔서 같이 풉니다. 보통 미국 사람들은 친하지 않더라도 지나가다 보면 "안녕"하며 인사를 많이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그런지 인사도 없이 똥 푸는데 전념합니다. 사실 "안녕"하고 말 걸면 "안녕, 똥 푸기 좋은 날씨지?" 이럴 수도 없는데 차라리 다행입니다. 


똥 푸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흙 퍼서 담는 느낌입니다. 다행히 풀만 먹고 싼 똥이라 그런지 냄새는 별로 안 납니다. 잡식 동물들의 똥처럼 질척거리지도 않아서 장화에 묻은 것들도 잘 떨어집니다. 그래도 똥은 똥입니다. 밖에서 놀다 차에 탄 큰 아이는 "아빠 차에서 이상한 냄새나요"라며 단 번에 알아차립니다.


정말 한국에 있었으면 절대 할 일이 없는 말똥을 푸며 가족들과 날씨 좋은 일요일 오후를 보냈습니다. 이 말똥들 덕분에 작년에도 깻잎, 토마토, 고구마, 고추를 원 없이 먹었습니다. 번식력 좋은 깻잎은 딸 시간이 없을 정도로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올해는 셋째가 곧 태어나 시간도 없을 것 같아서 작은 밭에 조금만 키울 것 같습니다. 올 한해 자식농사 뿐만 아니라 진짜 농사도 잘 되길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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